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폰 브라우히치 (문단 편집) == 평가 ==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이후 육군총사령관을 맡았던 국방군의 초기 주요 인물이며 [[전간기]]에는 포병 교리와 기갑 교리의 발전, 육군총사령관이 된 후에는 독일군의 기갑 전력 확충에 노력했고, 신분에 상관 없이 능력 있는 젊은 장교들을 대거 등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독일군이 연전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발터 폰 라이헤나우]], [[빌헬름 카이텔]] 같이 과도하게 나치당을 추종하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따르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영국에서 브라우히치가 육군 총사령관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여론이 높았다고 한다. 그만큼 대전 중에 이미 영미연합군에도 잘 알려진 지휘관이고, 연합군 측에서도 브라우히치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게다가 같은 참모장교 출신이던 [[프란츠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둘 다 히틀러가 작전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할더보다 브라우히치가 히틀러와 더 사이가 가까웠으므로, 작전에 관해서는 총참모장인 할더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관리자로서 히틀러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독일 육군 참모본부가 전략적 식견이 없다시피한 히틀러의 작전 개입을 브라우히치가 상대하고, 할더는 최대한 효율적인 방향으로 작전을 수립한 덕분에, 작전 독립성도 나름 확보하고 [[프랑스 침공]]에서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까지의 연전연승에 공헌했다. 명실상부 독일군 기갑전 신화의 일등 공신. 이렇듯 선진적인 교리를 일찌감치 받아들였고, 독단적인 할더와 달리[* 할더의 군 경력은 야전 경험이 전무했고, 이를 히틀러에게 비하당할 정도로 열등감이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야전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모습까지 보인 만슈타인, 구데리안, 모델, 롬멜 등과 전부 사이가 안 좋았다. 사적으로 불화가 있다고 이를 인사 배치에도 적용하는 게 할더의 고질적인 단점이다.] 총사령관으로서 장성들의 역할 배치도 잘 했고[* 독소전쟁 이전까지 기갑사단 근무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발터 모델을, 할더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한 것도 브라우히치이다. 물론 브라우히치는 이미 전간기에 모델과 함께 소련 카잔의 기갑학교에 다녀오는 등 모델이 초창기부터 기갑 교리를 연구해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육군 총사령관에서 경질된 후에도 입원 중인 병상에서 총사령관 업무를 수행했을 만큼 독일군 장성들의 신망도 있었다. 구데리안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브라우히치의 해임을 진심으로 아쉬워 했다. 그러나 이혼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냈고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지위,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프랑스 침공]]과 [[독소전쟁]] 초반까지도 히틀러의 작전 개입에 경악하며 여러 번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고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패전 이후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중부집단군 지휘관들의 퇴각도 승인하는 결단력을 보였으나, 결국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에게 빚을 진 입장이었고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1941년 12월의 패전 이후 해임된 브라우히치는 육군 원수로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만다. 전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국방군의 전쟁범죄를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책임 지는 대신, 이를 전면 부정하면서 [[국방군 무오설]]이라는 잘못된 전후 신화를 만들어내는 등 끝끝내 총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결국 대전 초기에 보여줬던 뛰어난 지휘력과 행정력, 관리 능력까지 자신의 오명으로 가려지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